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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삶과 죽음

Prof. 정금호 2009.10.13 15:12 조회 수 : 1718

[시대의 흐름에 서서] 국토의 삶과 죽음



미군기지 평택 이전 문제에 개입되어 있는 복합적 요인들을 간단히 말할 수는 없으나 핵심은 역시 농토에 정주하고 살던 사람들이 그 삶의 터전을 잃게 되고 이전을 강요당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적어도 이 삶과 삶의 터전의 문제해결에는 섬세한 이해와 참을성 있는 협의 과정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땅이 흔들리는 것은 평택만이 아니다. 지난해 프랑크푸르트의 한국 미술 전시회에 설치 작품을 내놓은 박준범씨의 작품에, 커다란 손이 도시 주차장의 자동차들을 장난감 옮기듯 이러저리 옮기고 또 장난감 기계를 만지듯 포클레인을 조종하여 땅을 헤집어 파고 고층 빌딩을 짓고 하는 것을 영상물로 만든 것이 있다. 오늘날 집을 짓고 땅을 헤집는 것은 장난감 다루듯 쉬워졌다. 이것은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평택의 경우가 아니라도 무슨 무슨 프로젝트다 기획이다 하여 발표되는 개발 안들은 우리 삶의 기반이-결국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토지에 뿌리내리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얼마나 쉽게 기술이나 관(官) 그리고 자본의 거대한 힘에 의하여 뿌리 뽑힐 수 있는가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우리는 모두 흔들리는 지각 위에 서 있다.

-삶의 터전 잃어버린 평택주민-

지난 4월2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제인 제이콥스가 타계했다. 제이콥스는 1961년의 획기적인 저서 ‘미국의 대도시의 죽음과 삶’ 이래, 도시개발과 건설의 문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도시와 건축의 평론가였다. 그가 통렬하게 비판한 것은 추상적으로 발상된 거대 개발 계획-문화 센터, 시민 센터, 도심의 거대 건물, 고층 빌딩들, 아파트 그리고 필요가 분명하지 않은 도로나 공원들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도시인들의 삶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영위되며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연구하기보다는 탁상의 이론가들이 그려내는 설계도를 그들에게 부과하려는 행위라고 제이콥스는 생각했다. 그것은 대체로 개발 대상지역의 주민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몰아내고 이 희생자들로부터 모호한 성과의 도시 개조를 위하여 거대 자금을 갹출해내는 수단이 된다. 그가 생각하는 미시적으로 관찰된 도시는, 다양한 삶의 기능들이 얽혀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변화하는, 유기적 복합체이다. 낡은 건물과 새 건물이 혼재하고 생활의 활발한 혼란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순한 거대 계획으로 이것들을 정비하려는 것은 도시의 생명력을 기울게 하고 그것을 죽이는 일이다.

도시 정비를 위한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필요와 그 복합적 연결에 섬세한 주의를 기울이고 점진적 발전을 유도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도시 구역민 자신, 그리고 개인들의 연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에 있어서 심리적 기반이 되는 것은 그 성원들의 고장에 대한 애착이고, 물리적으로는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사는 주거의 지속성과 안정이다. 도시 환경의 개선을 위해서는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주민들의 향상된 경제력도 있어야 하고, 정부나 금융 기관의 지원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게 거대한 것일 경우, 그것은 제이콥스의 표현으로는, ‘재난의 돈’이 된다. 자금은 구체적 필요에 맞추어 오랜 기간 동안 투입되는 ‘점진적인 돈’이라야 한다.

-개발 계획이 도시생명 빼앗아-

도시 개발에 대한 이러한 미시적 접근은 거시적으로 도시 계획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순진한 발상으로 생각되었다. 도시 문제에 있어서의 중요한 사상가인 루이스 멈포드는, 제이콥스의 생각은 소박한 민간요법만으로 암 환자를 고치겠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멈포드의 말은 미국이나 캐나다보다도 한국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전혀 다른 생활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근대적 도시기반을 새로 만들어야 하고 시행착오와 혼란의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 좁은 국토에서, 거시적 개발의 비전은 불가피한 점이 있다. 그러나 제이콥스의 도시론의 대 전제-즉 도시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일하고 교환하고 하는 삶의 토대가 되어야 하며, 그 개선은 그들의 필요와 의지에서 자주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이 대 전제는 강조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거대 계획에 의한 주거지의 환골탈태를 원하는 것은 바로 주민들이다. 정부가 선포하는 도시와 주거 그리고 토지의 개발 계획에 대부분 주민들이 반대하지 않음은 물론 이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여기에 맞춘 것이 지난번 대통령 선거로부터 시작하여 일반적인 선거 전략이 된 거대 계획들의 공약이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지역과 주거의 근대화를 소원하고 정부의 지원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개발 계획들이 참으로 주민들의 주거와 생활의 필요에 연결된 것인가 하는 것은 확실치 않다. 정치인들의 공약은 대체로 의료 시설이나 교육 시설 또는 서민 주택의 개선보다는 바로 제이콥스가 비판한 단순화된 비생활적인 거대 계획들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여기에 만인이 동의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동의를 가능케 하는 것이 생활의 필요보다는 부동산의 이해관계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동산의 관점처럼 모든 것을 추상화하는 것은 없다. 거시적 개발 계획은 여기에 맞아들어 간다. 그리고 집과 동네에 뿌리 내리고 사는 사람들까지도 결국 부동산과 거대 계획의 지배 하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작은 거주자취도 소중한 역사이에 대하여 부동산값 억제를 시도하는 현 정부의 노력은 사람의 주거와 토지를 본래의 목적으로 환원시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거대 계획들은 바로 국토의 부동산화를 촉진한다. 또 여기에는 토지의 부동산화는 누적된 정책적 사고의 습관이 관계되어 있다. 역대 정부는 주택건설이나 국토 개발-정부의 개입에 의한 또는 건설업자의 중간 매개자를 통한-개발의 비용을 주로 개발 토지가격의 상승에 의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토지 부동산화의 원인(遠因)의 하나는 여기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1960년대 말 스웨덴의 한 도시 전문가가 정부의 재정적 부담 없이 시장을 통해서만 주택문제를 해결하려는 한국의 주택정책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생활과 작업 환경의 개선을 개발 토지의 가격 상승에 의존하는 오랜 관행은 마침내, 집과 땅으로 하여금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오로지 수익의 수단이 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토지와의 관계는 우리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한계 조건이다. 물질적 현실이 추상화된 이미지의 현실로 대체되는 현상을 해명하고자 한 장 보드리야르의 미국을 논한 짧은 책에, 미국의 도시들이 자랑하는 바둑판의 정연한 질서를 언급한 것이 있다. 역사가 없는 토지의 도시 설계는 단순한 공학과 기하학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유럽과 같이 많은 역사적 건물의 존재를 고려해야 하는 도시 계획에서 똑바른 길을 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포괄적으로 말하여, 기념비적인 것이 아니라도, 사람의 거주의 모든 자취가 역사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결을 이룬다. 도시를 추상적인 거대 계획에 의하여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발상이 미국의-이란 침공을 포함한-대외전략 그리고 국내 정책을 비인간화하는 데에 적어도 하나의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오늘의 한국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욕망과 야심, 또는 신념이 추상적 열광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본다. 그 전제(專制) 하에서 사람의 여러 사정과 필요를 조심스럽게 살필 여유는 없다. 우리가 안거(安居)를 허용하는 토지와 집에서 유리되어 부동산 속에 부유한다. 우리야말로 주거와 삶의 안정을 생각하는 제인 제이콥스적인 도시 비평이 필요하지 않다 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06-05-24 18: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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