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건축의 재발견
나는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를 읽었다.
얼마전 MT에서 광한루를 답사했기에 '설화로 이룬 천상의 세계, 광한루원'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말 직접해보고 경험하는게 중요한거 같다.
직접 보기전에 읽었을땐 대충읽고 넘어갔던 것들이 직접보고 와서 글을쓰게되니 본게 있어서 이해되지 않았던, 의아했던 부분이 이해됬다.
광한극원의 역사는 1419년 관직을 내어놓고 황희가 새로이 누대를 크게 신축하며 광통루라는 누각이 세워지며 시작된다.
광한루의 경영사는 크게 3시기로 구분된다고 하는데 첫째가 바로 황희가 신축한 광통루 시절로 1419년부터 1581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정원시설이 없는 단일 누각으로 존재했다.
비록 본격적으로 정원이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광한루에 올라 바라보는 앞산과 요천으로 어우러진 경치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두번째는 정원문화에 익숙했던 정철이다.
1582년부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까지로, 광한루 앞에는 커다란 호수가 조성되고 오작교가 놓여지며 3개의 섬, 즉 삼신도가 축조되어 본격적인 원림으로 경영되던 시기이다.
큰호수는 은하수를 상징하였고 3개의 섬에는 여러종류의 꽃으로 가득하게 했다.
하지만 환상적인 정원과 누각도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에 타 황폐해졌고 이를 본격적으로 재건한 것은 1626년이였다.
당시 정철의 큰 골격을 깨트린 것이 아니라니 참 다행이다.
20세기 들어서 광한루의 기능이 급변했다.
일제의 남원재판소와 헌병분견대로 사용되었고, 춘향을 앞세운 관광지로 탈바꿈되었다.
광한루는 처음에는 단순한 개인 누각에서 관청의 객사누각으로, 원림, 근세에 들어서 관광지로 탈바꿈되었다.
처음에는 미처알지 못했던 광한루의 역사이다.
또한 광한루에는 여러가지 사상과 설화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광한루 월랑의 창방위에 새겨진 거북이와 토끼조각은 불교설화인 귀토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직녀와 견우의 설화를 수반하게 되면서 직녀의 베틀을 고였따는 지기석과 견우과 은하수를 건널때 타던 작은배라는 상한사를 설치했다.
이로써 가장 뛰어난 로맨스인 '춘향전'이 탄생할 공간적·장소적 조건을 갖추게 되었고 춘향전의 무대가 되었다.
광한루에 가기 전 선배들이 잘 봐두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거의 모든 나라의 건축물이 섬세하고 아름답겠지만 단연 우리나라가 최고인것 같다.
이러한 것들이 후에 나로인해 세계 곳곳에 알려졌으면 한다.